이번 포스팅에서는 일제 강점기 시기에 조선의 식민지 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졌고, 그 안에서 어떤 독립투쟁이 벌어졌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일제 강점기 식민지 교육과 교육 독립투쟁
일제 강점기 교육
식민지 교육정책은 을사조약 체결로 시작되었습니다. 1905년에 일본의 교육제도가 우리나라에 도입되어 학년이 시작되는 시기가 4월로 정해지고, 학년은 두 개로 나누어졌습니다. 소학교는 보통학교로 명칭이 변경되고, 수업 연한이 8년에서 4년으로 줄었습니다. 또한 중학교는 고등학교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수업 연한이 3~4년으로 설정되었습니다. 1908년에는 사립학교령이 시행되어 정부의 인가를 받지 않은 학교는 폐쇄될 수 있도록 규정되었습니다. 1911년 조선교육령에서는 한국인을 충성스러운 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해 일본어와 일본문화가 주입되었으며, 한국의 민족문화가 말살되었습니다. 또한 식민지의 효과적 경영을 위해 초보적 실업교육이 실시되었습니다. 1918년에는 서당규칙이 시행되어 탄압이 강화되었으며, 1930년대에는 개량서당이 거의 말살되는 과정이 이루어졌습니다.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한 교육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한 교육 정책은 조선인을 일본의 충성스러운 국민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이를 위해 다양한 조치가 취해졌습니다. 일본어 강요, 일본의 문화와 교육 체제를 주입하고 일본 교과서를 사용하며, 일본인 교사를 채용하고 조선인 교사와 학생들의 사상을 감시하는 등의 방법이 사용되었습니다. 학교 교육 내용은 필수 과목으로 수신, 국어, 조선어, 한문, 산술이 포함되었으며 선택 과목으로는 이과, 가창, 체조, 도화, 수공, 재봉, 수예, 농업 초보, 상업 초보 등이 있었습니다. 특히 일본어 수업은 주당 10시간으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한국인을 회유하기 위한 일본의 교육(1919~1936)
한국인을 회유하기 위한 교육 정책(1919~1936)에서는 일본이 조치를 취했습니다. 한국인의 낮은 의식 수준을 고려하여 일본인에 대한 교육과 차별을 두었습니다. 이는 보통학교와 고등학교의 수업 연한을 각각 6년제와 5년 제로 늘렸으며 조선인도 대학교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허용했습니다. 학교 수를 확장하여 모든 면에 보통학교를 설치하고 우민화 정책을 수정하여 대학 설립을 시작했습니다. 또한 사립학교에 대한 탄압을 완화하고 기독교계 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것을 허용했습니다.
일본인화 교육으로 회귀(1936~1945)
일본인화 교육으로의 회귀는 1936년부터 1945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내선일체라는 구호 아래 조선교육령에 따라 한반도의 교육제도에 변화가 있었습니다.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서는 보통학교 수준의 교육이 필요했기 때문에 보통학교의 수가 대폭 늘었습니다. 조선인을 위한 학교의 명칭을 일본인을 위한 학교의 명칭과 동일하게 통일하였습니다. 한국어가 필수과목에서 제외되어 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지 않는 방향으로 교육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조치는 일본이 동아시아의 패권을 확장하기 위해 벌인 전쟁에 조선인을 최대한 끌어들이기 위한 교육정책이었습니다. 국민학교는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다하는 백성을 양성하는 학교로 정의되었습니다.
식민지배
식민지배 충족요건
무력에 의한 폭력장치: 군대와 경찰을 통해 국민을 진압하고 식민지의 군사적 통제를 강화했습니다. 무력은 식민정치의 핵심 수단 중 하나로 작용했으며, 국민에 대한 강제 이주와 집단 강제노동과 같은 방법을 통해 식민주의의 목적을 추진했습니다. 기만에 의한 허위의식 주입장치: 교육과 선전을 통해 일본의 이념과 문화를 강요하고 조선인들에게 일본의 우월성을 주입하여 충성심을 유발했습니다. 교육체계를 통해 일본의 역사관과 문화, 언어가 강조되었으며, 조선인들은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강요받았습니다. 식민지의 민족적 정체성 파괴와 고유문화 파괴: 한국의 역사, 언어, 문화 등을 부정하고 일본의 역사와 문화를 강조하여 조선인의 정체성을 파괴했습니다. 이는 민족주의를 약화시키고 일본의 통제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식민지교육은 참된 교육이 아니었습니다. 교육체계가 민족의 발전과 인권을 증진시키는 것이 아니라 식민주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습니다. 교육은 일본의 통제와 지배를 강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었으며, 창의성과 독립적 사고를 억압했습니다. 일본의 메이지 개혁을 통해 제국주의 강국으로 부상하면서 세력을 확대하고 대동아공영 권을 건설하기 위해 대동아교육체제를 형성하였습니다. 이는 식민지교육체제의 발전과 통제에 영향을 미치는 원인 중 하나였습니다.
일제의 민족교육세력 압박
'사립학교령'에 따라 합법적인 척해서 사립학교를 압살 하였습니다. '사설학술강습회에 관한 건'이라는 법령을 만들어 야학 및 학술강습회를 탄압하였습니다. '서당규칙'을 만들어 개량서당을 탄압하고 말살하였습니다. 개량서당은 서당의 형식을 따르면서도 근대적인 민족교육을 수행하는 곳이었습니다. 1920년대 말 이후로는 교육활동이 대폭 축소되었습니다. 문화주의는 3·1 운동 이후 1920년대에 교육의 선심을 베풀고자 했으나, 이 교육은 사실상 '일본인화'였으므로 식민통치의 수단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교육 독립투쟁
교육투쟁
도구적 교육과 교육 그 자체를 통한 저항: 총독부의 교육정책에 반대하며, 사립학교에서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비밀 민족교육을 조직하여 실시했습니다. 해외에서도 만주, 중국, 연해주 등에서 민족교육을 실시했습니다. 우리의 민족교육: 한국인들이 주체가 되어 실시한 교육으로서, 독립 투쟁의 중심적 방법으로서 교육을 이용하여 민족독립 의식을 고취시키고 군사적 투쟁 능력을 키웠습니다. 교육 그 자체의 독립투쟁: 교육활동을 통해 식민지 지배로부터 독립시키고 민족교육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민족교육자들은 야학, 강습회, 서당 등을 조직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민족정신을 전파하는데 기여했습니다.
식민지배에서의 교육투쟁
식민정부의 교육정책에 반대하며 독립적인 민족교육을 실시했습니다. 사립학교를 통한 투쟁: 총독부의 휴교나 폐교 위협에도 불구하고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등의 저항을 펼쳤습니다. 지하에서의 비밀 민족교육: 야학, 위장 서당, 비밀학습조직, 농촌계몽운동 등을 통해 민족교육을 실시했습니다. 해외에서의 민족교육운동: 만주, 중국, 연해주 등에서 학교를 설립하고 민족교육을 실시했습니다.
상해임시정부 민족교육운동
상해임시정부는 독립투쟁 과정에서 교육의 이념과 제도를 분명하게 제시하였으며, 교육강령을 통해 독립 후의 교육 방침을 발표했습니다. 1923년 5월 10일에는 임시의정위원회에서 교육방침을 발표하였고, 1941년 11월에는 건국강령이 제정되었습니다.
민족 선각자가 설립한 교육기관
사학은 선각자나 부유층 개인들이 설립한 학원으로, 서구식 교과와 민족정신을 함께 강조하며 군사훈련을 포함한 교육을 실시했습니다. 일부 사학으로는 양정의숙, 보성학교, 휘문의숙, 오산학교, 대성학교 등이 있습니다.
다음시간에는 남북 분단하에서 교육제도가 어떻게 수립되고 전개되어 왔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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