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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교육사회학

일제 강점기 식민지 교육과 독립투쟁

by 소금쟁이89 2024. 2. 4.

한국은 일제 강점기 교육으로 식민지 교육정책에 따라 일본의 교육제도를 도입했습니다. 1905년 일본의 교육제도가 우리나라의 도입되었고, 학년이 시작되는 시기는 4월로 정했었습니다. 학급의 개념이 도입되었고 소학교에서 보통학교로 명칭도 변경됩니다. 수업연한 8년에서 4년으로 단축했고, 중학교를 고등학교로 명칭을 변경하여 수업연한을 3~4년으로 통일합니다. 1908년 사립학교령으로 정부의 인가를 받도록 규정하고 인가를 받지 않은 학교와 인가를 받은 학교라도 학부대신의 결정으로 폐쇄할 수 있었습니다. 1911년도에는 조선교육령으로 한국인을 충성스러운 일본인으로 만드는 작업을 시작합니다. 일본어를 비롯해서 일본문화를 주입하여 한국의 민족문화를 말살합니다. 식민지의 효과적 경영을 위해 초보적인 실업교육을 실시했고 식민지는 제국주의 산물로 조선의 핍박이 시작됩니다. 일제의 식민지 경영으로 식민지 민족의 역사와 문화, 민족의 혈통을 파괴하고 식민사관으로 역사가 왜곡되며 한국어를 말살하였습니다. 1918년에는 서당규칙으로 탄압을 강화했고 1929년 규칙을 개정하여 1930년대에는 개량서당을 거의 말살하다시피 했습니다.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한 교육으로 조선인을 천황이 다스리는 일본의 충성스러운 국민으로 만드는 정책을 펼칩니다. 일본어를 강요하고 일본의 문물을 주입하였으며, 일본 교과서를 사용하고 교사도 일본인이었습니다. 학교에서 가르친 내용으로는 필수과목이 수신, 국어, 조선어, 한문, 산술이었고, 선택과목은 이과, 가창, 체조, 도화, 재봉, 수공, 수예, 농업초보, 상업초보였습니다. 일본어 수업시간은 주당 10시간이었지만 조선어와 한문시간은 5~6시간이었습니다.

 

한국인을 회유하기 위한 교육으로 한국인을 달래 기 위해 조선인에게 낮은 의식 수준에 맞춰서 일본인에 대한 교육과는 차등을 둔다는 정책을 수정합니다. 보통학교 4년제를 6년제로, 고등학교 4년제를 5년 제로 그리고 조선인도 대학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합니다. 학교의 수도 대폭 늘려서 3개 면에서 1개의 보통학교만 설치했었는데, 모든 면에 1개의 보통학교 설치로 변경합니다. 우민화 정책을 수정하여 대학을 설립하기 시작했고, 사립학교에 대한 탄압, 기독교계 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걸 허용합니다. 일본인화 교육으로 회귀하여 내선일체라는 구호 아래에서 조선교육령에 따라 한반도의 교육제도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조선인을 전쟁에 내보내기 위해 보통학교 정도의 교육을 시킬 필요가 있었고, 보통학교의 수가 대폭 증가하게 됩니다. 조선인을 위한 학교명칭을 일본인을 위한 학교 명칭과 동일하게 했고, 한국어를 필수과목에서 제외하여 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지 못하게 했습니다. 일본이 동아시아의 패권을 쥐기 위해 벌인 전쟁에 조선인을 최대한 끌어들이기 위한 교육일 실시했고, 국민학교는 일본천황에게 충성을 다하는 백성을 양성하라는 의미였기에 이 명칭이 초등학교로 변경된 건 최근일입니다(김영삼 정부)

 

식민지배로 무력에 의한 폭력장치로 군대와 경찰이 있었고, 기만에 의한 허위의식을 주입하기 위해 교육과 선전을 활용합니다. 식민지의 민족적 정체의식과 고유문화를 파괴하였고 식민지교육은 참된 의미의 교육이 아니었습니다. 일본의 메이지개혁으로 제국주우의 강국의 하나로 부상했고 세력을 확대하여 대동아교육체제를 형성하게 됩니다. 일본의 민족교육을 말살하기 위해 사립학교령에 따라 합법을 가장한 사립학교 압살이 시작됐고, 사설학술강습회에 관한 건으로 법령을 만들어서 야학과 학술강습회를 탄압합니다. 서당규칙으로 개량서당을 탄압했고 1920년대 말 이후로 교육활동을 축소시켜 버립니다. 문화주의로 3.1 운동 이후로 선심을 베푸는 척했지만, 그 교육은 일본인화였기 때문에 식민통치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당시 조선에서는 교육투쟁을 위해 총독부 교육정책에 대항하였고, 사립학교의 민족교육과 비밀 민족교육으로 만주와, 중국, 연해주 등지에서 해외 민족교육을 실시합니다. 독립 투쟁의 핵심적 방편으로 교육을 이용했고, 민족독립의식을 고취하여 군사적 투쟁능력을 양성합니다. 교육 그 자체의 독립투쟁으로 교육활동 자체를 식민지 지배로부터 독립시켰고 민족교육을 계승하여 발전시키는 노력을 기합니다. 민족교육으로는 야학, 강습회 서당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식민지배 하에서 총독부 교육정책에 대항하는 투쟁으로 식민정부의 휴교, 폐교 위협에 맞서 민족교육을 실시했고, 지하에서 비밀 민족교육으로 야학, 위장 서당, 비밀학습조직, 농촌계몽운동을 벌입니다. 만주, 중국, 연해두 등에서 해외에서의 민족교육운동도 대표적인 활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상해임시정부에서는 독립투쟁과정에서 교육뿐만 아니라 독립 후의 교육에 대해서도 이념과 제도를 분명히 하고 자세하게 제시합니다. 1923년 5월 10일에는 임시의정위원회의 와 교육방침이 발표되고, 1941년 11월에는 건국강령이 제정됩니다. 민족 선각자가 설립한 교육기관으로는 사학이 있습니다. 선각자나 부유층 개인들이 설립했고, 오늘날 사설학원과 유사합니다. 가르치는 내용으로는 서구식 교과와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내용으로 구성하여 체력을 단련하는 군사훈련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국정교과서제와 검인정 교과서제를 병행했고, 사학으로는 양정의숙, 보성학교, 휘문의숙, 오산학교, 대성학교가 있습니다.

 

식민지교육과 독립투쟁 내용을 정리하자면, 일본은 사립학교령, 조선교육령, 서당규칙을 만들어서 교육활동을 탄압했고, 식민지 교육은 참된 의미의 교육이 아니고 식민지의 민족적 정체의식과 고유문화를 파괴하였습니다. 교육투쟁은 한국인들이 주체가 돼서 실시한 민족교육이고, 교육활동 그 자체를 식민지 지배로부터 독립시켜서 민족교육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려는 노력을 했습니다. 식민지배하에서 국내외에서 다양한 교육투쟁을 실천한 것이 식민지교육과 독립투쟁의 내용정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시간에는 남북 분단하에서 교육제도는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