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육제도의 변천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개화기 이전의 교육과 그 이후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먼저 유학중심의 교육제도로 삼국시대부터 조선말까지의 교육내용을 봐보겠습니다. 유학중심의 교육제도로 사서삼경을 비롯한 유학으로 중국의 고전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사서는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을 의미하고 삼경은 시경, 서경, 역경을 말합니다. 사서삼경 중에서 가장 근원적인 책인 주역은 동양철학 사상의 근원적인 원리를 담고 있는 철학서입니다. 교육기관을 살펴보겠습니다. 고구려시기에는 태학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소수림왕 때, 태학은 관리를 양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유학 교육기관으로 여기에서는 중국의 경학과 문학은 물론이고 무예도 교육했다고 전해집니다. 오경과 삼사를 중심으로 교육하였고 주로 귀족 자제가 입학하여 교육을 받았습니다. 경당은 고구려의 사학 교육기관으로 한국 최초의 사학이라 볼 수 있습니다. 태학이 이 상류층 자제를 모아 유학을 중심으로 교육하는 관학이었다면 고구려 후기에 설치된 경당은 일반 평민층이 그들의 자제를 교육하기 위해서 설립되었습니다. 여기에서는 경전과 궁술을 가르쳤습니다. 평양천도 이후로는 경당은 각처에 설치돼서 문무를 겸비한 인재를 양성합니다.
백제시기에는 오경박사제도로 교육기관의 이름이 전하지는 않습니다. 삼국사기 등에 나타난 기록을 보면 오경 박사 제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오경 박사 제도는 한나라에서 비롯되었고, 박사로는 고흥, 아직기, 왕인을 들 수 있습니다. 신라시대에는 화랑도와 국학이 있습니다. 640년 당나라에 유학생을 파견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화랑도를 통해서 무술을 연마하고 정서를 함양하였습니다. 삼국통일 이후에는 682년 신문왕 때, 관리를 양성하기 위해 국학이 설립되었고, 국학은 유학 이념을 연구하는 기관이며, 이후 도입된 독서삼품과를 통해서 문관을 등용합니다. 고려시대에는 국자감, 향교, 학당, 지방의 선비들이 사학을 설립하였고, 관학과 사학이 병존하게 됩니다. 관학은 중앙정부와 지방관서가 운영하고, 왕조 초기에는 흥했습니다. 성균관에서는 고려 말과 조선시대 최고의 국영 교육기관으로 과거를 위한 준비교육기관입니다. 현재의 대학교육기관의 역할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중앙에는 최고 학부인 성균관과 4학, 지방의 중등교육기관인 향교, 초등교육기관인 서당을 운영하였고, 향교는 성현에 대한 제사와 유생의 교육, 지방민의 교화기능을 담당했습니다. 각 부, 목, 군, 현에 하나씩 있었고 규모와 지역에 따라 중앙에서 교관인 교수 또는 훈도를 파견했습니다. 초등교육에 해당하는 서당에서는 4학이나 향교에 입학하지 못한 선비나 평민의 자제를 대상으로 사설적으로 운영했습니다. 교육기회는 주로 양반층과 남성들에게 허용되었고 백성들 대부분이 문맹이었습니다. 세종 임금 때는 한글 창제로 백성의 학습기회가 확대되었지만, 지배계급은 여전히 한문중심의 문자 생활을 했습니다. 지배문화에 접근이 불가한 상황이라 할 수 있죠.
교육지배방식을 살펴보자면, 시험제도는 국가가 운영하였기에 국민의 학습활동을 조장해서 학습내용을 관리했습니다. 다수의 국민들은 사설교육기관인 서당과 향교, 서원에서 공부했고, 서양교육이 오랫동안 교회 지배하에 있었던 것과는 다르게 한국은 처음부터 정부가 교육을 지배하고 운영했습니다. 개화기 교육에서는 원산학사를 통해서 19세기말 서양을 향한 개방과 근대화의 불가피성에 직면하게 됐고, 원산 개항지 주민들의 교육 근대화 요구로 설립됩니다. 정식학교였고, 자생적인 교육기관이었습니다. 문반에서는 상업과 해외무역, 행정을 담당했고, 무반에서는 치안유지에 필요한 군사훈련을 합니다. 육영공원에서는 조선 정부가 이용후생을 위해 서양 과학기술문명을 도입을 위해 설립했고, 최초 신식학교입니다. 한성사범학교는 초등학교 교사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됩니다. 정부주도적 학교였고 의무교육제도를 도입하기 이전에 해당합니다. 배재학당에서는 기독교 선교사인 아펜젤러를 중심으로 하는 외국인이 설립한 학교로 남학생들을 위한 중등과정 사립교육기관이었습니다. 이화학당은 기독교 선교사인 스크랜턴 부인이 설립했고 여성교육의 산실로써 초등교육과 중등교육, 대학교육을 모두 실시했습니다.
정부의 주도로 공교육에 의한 근대적 국민교육제도 수립을 추진했고, 한성사범학교관제, 소학교령의 제정과 학교설립 추진 노력은 당시에 조선정부가 국내외 환경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주도적인 교육개혁을 추구한 사실을 보여줍니다. 외국 자극에 의해서 시작된 게 아니라 18세기 실학자들의 보편적인 국민교육론에서 출발하여 자생적으로 국민초등교육제도를 수립합니다. 민간의 주도에서는 소규모 교육기관이 형식을 갖추지 못한 채 활발이 운영했고, 학교시설, 교사, 교육과정 등 법령에 의한 정식학교만큼 구비되지 않았지만 신학문에 대한 열의로 교육활동이 조직됩니다. 민간교육활동이 정식학교에 비해 훨씬 많았습니다. 1908년 학교인가를 신청한 학교가 1,217개교에 달할 정도였습니다.
한국의 학교제도의 변천을 정리하자면, 삼국시대부터 조선말까지 교육내용은 유학 중심의 학문이었고 서양 교육이 오랫동안 교회의 지배를 받았던 것과 다르게 한국은 처음부터 정부가 교육을 지배하였다는 점. 국가가 과거제도를 운영하여 국민의 학습활동을 조장하고 학습내용을 관리했다는 점. 개화기 교육기관의 운영은 정부와 민간이 모두 주도했었고 교육개혁추구와 대한 열의를 알 수 있습니다.
다음시간에는 일제 강점기의 평생교육이 어떻게 발달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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